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정희 정부/평가/부정적 평가/경제 (문단 편집) ==== 성급한 중공업 투자와 오일쇼크 파동 ==== [[파일:70년대오일쇼크.jpg]] ||석유를 사기 위해 길게 늘어선 줄|| 대한민국은 1976년에 세계 19위의 무역국에 올라서고, 1977년 1인당 GDP 1,000달러를 돌파함과 동시에 수출 100억달러를 달성하였으나 기술, 제품 등의 해외 의존율이 높아 외화 가득률이 떨어져 [[부가가치세]]를 도입하는 등 순이익은 매출에 비해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부가가치세 도입 당시 민중의 불만은 대단하였고, 순부채는 꾸준히 누적되어 [[오일 쇼크]]가 일어나자 국가가 통째로 부도 날 뻔했다. 1979년 2월 [[이란]] 혁명으로 집권한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호메이니]] 정부는 혁명 직전 미국으로 탈출한 [[팔라비 왕조|팔레비]]의 송환을 미국에 강력히 요구했으나 미국 정부가 거절하자 서방국가에 대한 석유수출 전면금지 조치를 내린다. 세계 석유 공급량의 15%를 차지하는 이란의 석유수출 금지조치로 인해 다시 한 번 석유 가격이 폭등하였다. 이 사건을 [[오일 쇼크#s-3|제2차 오일쇼크]]라고 한다. 2차 오일쇼크가 일어나자 대한민국은 1972년부터 추진해오던 중화학 공업 중심의 [[경제계획(대한민국)#s-8|제3차 경제 개발 계획]]이 발목을 잡히면서 대공황 상태에 직면하였다. 1배럴에 12달러 하던 유가가 36달러까지 치솟자, 일본 및 선진국의 유휴설비를 차관을 통해 들여왔던 한국 중화학 공업계는 파산 직전의 상태에 직면했다. 중화학 설비를 가동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유류소비가 불가피한데, 2차 오일쇼크로 도저히 채산성을 맞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산업생산성은 급속히 추락했고 공장 가동율은 한 때 50%밑으로 추락하여 기업들이 줄도산하였고, 성장율은 마이너스 5%를 기록하였다. 게다가 미국의 [[연방준비제도|연준]] 의장인 폴 볼커가 기준금리를 20%까지 끌어올리는 바람에 미국이 빌려준 차관에 대한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생존한 기업 역시 중화학 공업 육성을 위해 도입한 자금을 갚으려고 빚으로 돌려막기를 하는 악순환을 빚어냈으며, 외채는 눈덩이처럼 불어나 한국경제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증가, 1979년말 180억 달러(당시 원화가치 기준 8조 7천억 원)였던 외채는 결국 1985년 500억 달러(당시 원화 가치 기준 44조 5천억 원) 수준으로 급증하였다.[* 대한민국의 1985년도 수출액은 300억 달러 수준이었으며, 한 해 국가 예산은 12조였는데, 이 때문에 IMF의 근본적인 원인이 사실상 군사정권의 과잉 중공업 투자에 기인했다는 근거가 됐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는 국내 금리를 20%보다 낮게 설정하여 실질적인 마이너스 금리를 실시함으로써 차입경영[* 회사 경영이 과도한 부채를 기반으로 운영되는 상태]을 유도하였고, 대외적으로는 빚을 더 많이 들여옴으로써 부실경영을 주도했다. 1977년 갚지 못한 차관이 68억 달러나(원리금43억, 이자 22억) 남은 상황에서, 3년간 73억 달러을 새로 들여온 것이다.[* 이대근, 한국무역론 : 한국경제선진화의길 제2판 248쪽] 그리하여 1979년에는 세계 15위의 무역대국으로 올라서며 OECD로부터 [[신흥공업국]]이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며 [[개발도상국]] 선두에 서게 되지만 내적으로는 병들 대로 병든 상태였다. 1970년대 말부터는 [[서울]] [[서울/강남|강남]] 개발에 본격적으로 착수하며 성장, 균형, 안정, 자립적 경제구조의 구축, 지역간 균형적 발전을 목표로 삼고 1979년에는 1인당 GDP 1,600달러를 달성하였다. 하지만 그만큼 주택 부동산가와 물가가 대폭 상승한 시기였다. 이에 제4기(~[[1982년]])는 외적으로는 중화학공업의 제조업 비율 증가(53% 달성)를, 내적으로는 소득분배와 생활환경 개선, 주택 공급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신통치 않았고 9% 성장의 목표에 비해 성장은 5.5%로 다소 부진하였다. [[폭망|특히 1979년 2분기에는 0%대 성장을 하여]] 전분기 5% 성장과 큰 대조를 이뤘고, 3분기와 4분기는 -1%대, -2%대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하게 됐다. 박정희 사망 직후인 1980년 초반 한국 경제는 그야말로 사면초가나 다름없었고, 80년도 경제성장률은 -2.1%였지만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28.7%에 이르렀다. 같은 해 경상수지는 53억 1200만 달러라는 대규모 적자를 냈으며 실업률은 5.2%에 달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란-이라크 전쟁]]의 결과로 인한 저유가 시대 도래와 '플라자 협상'에 따른 저환율 시대가 도래해 기업 생산성이 좋아져 가까스로 국가 부도를 막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88년 이후 국제원자재 가격 상승 등 대외적 여건이 변화하고, 3저호황기(저유가, 저환율, 저금리 시대)에 벌어들인 막대한 이윤이 생산적 투자가 아닌 부동산 및 주식투기로 집중되는 대내적 요인으로 인해 수출경쟁력이 급속도로 둔화되면서 수출이 침체되고 적자수출을 재현하는 등 한국 경제는 침체를 계속하였다. 박정희 평전[* 전인권 저서]에서도 3.4 개발계획을 통해 중공업을 발전시켰으나 이는 내적으로 문제가 있는 정책이었다고 평가한다. 우선 중공업의 발전으로 수많은 전문직(단순 노무자가 아닌)이 양상되었고 한편 농촌에선 도시로 인구가 빠져나감에 따라 붕괴가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이는 곧 임금 상승과 쌀값 상승으로 연결되었으나 박정희 정부는 물가안정과 경제 개발이라는 이유로 임금과 쌀값을 동결한 상황이었다. 즉, 박정희의 경제정책은 경제 발전에 따른 임금과 물가 상승을 무시한 모순적인 정책이며 국민들의 반감을 사는 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증거로 [[부마민주항쟁]] 등 [[김재규]]에 의한 [[박정희]] 암살 직전의 한국 상황을 보면 노동자나 농민을 중심으로 항쟁이나 소요가 일어나고 있었다. [[보릿고개]]란 말이 심심치 않게 나왔을 정도로 강남 개발 붐이 일던 시절 국민 태반이 최저 생계비 9만 원에도 미치지 못하는 삶을 살았다. 성급한 중공업 육성 과정은 경공업을 후퇴시켜 노동자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공산주의 국가들의 경제 정책의 비판요소들과 흡사하다. 북한 김일성 정권의 경제정책 또한 경공업의 기반이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중공업에 대한 과잉 투자로 북한의 경제를 파탄시켰다는 동일한 비판을 받는다. 실제로 중공업에 투자한 뒤 그토록 높았던 경제성장률이 수직낙하하는 양상이 비슷하다.[[https://www.kea.ne.kr/publication/kjes/article/read?id=2417|#]]][* 위에서 말했듯이 중공업과 수출주도정책에 대한 계획은 박정희 정권 이전부터 존재했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는 제대로 된 기반이 안된 상태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정권 내부에서도 1970년대 말 중공업 과잉 투자에 대한 비판이 계속되자 박정희는 한국은행, 경제과학심의회, 한국개발연구원 등이 상황보고서를 제출토록 했다. [[http://www.archives.go.kr/next/common/archivedata/render.do?filePath=2F757046696c652F70616c67616e2F313434353537353935313337382e706466|#2]] 이때 한국 경제는 1차 석유 파동 당시보다 석유 의존도가 높아진 상태였기 때문에 경제의 타격이 컸다. 한국 경제가 경제 성장률 마이너스를 기록한 몇 안 되는 시기로, 이 정도로 급격한 하락은 '''1997년 외환위기''' 당시에나 있었다. 또 정부는 중화학 공업에 집중한 채 유가 상승에 대한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 못하였으며, 그 결과 박정희 정권에 대한 불만도가 높아졌고, YH 사건 등 노동 시위가 잦아졌으며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나면서 박정희 정권의 몰락의 원인을 가져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